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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세번째, 순수한 죄책감 #순수한 죄책감 평생 글을 쓰겠다고 약속한 계기가 있다. 바로 죄책감이다. 나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 햇수로 치면 벌써 4년이나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많은 인간관계가 그렇듯 마냥 싸운 일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막심한 선택이었는지 서서히 깨달았다. 의 표현처럼 오히려 시간이 흘러 기억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기억은 더 세세하고 뚜렷하게 보이는 듯하다. 사람을 가벼이 여기던 시절에 그냥 재밌는 놈이구나 싶어 친하게 지냈던 옛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네 도움은 내 생활 전반에 스며들어 있었다. 막무가내로 쓰던 글을 너에게 보여줬고, 너는 우스갯소리를 섞어가며 부담 없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모든 꿈에 대해 부정하던 나와 정반대의 가치관과, 그러면서도.. 더보기
스물두번째, 지적허영 #지적허영 나쁜 버릇이 있었고, 지금도 남아있다. 그건 짙은 허영심이다. 당장은 괜찮아 보이면서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웃음이 새어나올 옛날 일들이 떠오른다. 매일 무식하다고 무시 받은 고등학교 시절, 유일하게 내가 잘하는 게 글쓰기라 생각하곤 한창 위로하던 그 무렵. 나는 사람들에게 단어 선택이 부자연스럽고 안 쓰는 말을 괜히 고집한다고 혼났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 단어들은 내 자신감이었고 글을 과시하는 수식이어서 형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도통 잔소리 이상으론 듣지 않았다. 책을 읽지 않고 글만 쓰다 보니 보이는 게 내 글뿐이고, 그래서 내 세상에 빠져든 탓이다. 그런데 대학교 진학 후 교수님에게 들었던 비평이, 내가 얼마나 잘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는지 실감토록 했다. 딴에는 잘 썼다고 제출한 답.. 더보기
스물한번째, 우산 #우산 “너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꼭 우산을 생각해라.” 나는 그 차디찬 겨울날 교수님의 짙은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원래 교수란 딱 두 가지인데, 이상하거나, 엄청 이상한 사람. 이 두 가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교양 과목의 그 교수님은 워낙 이상하고 특이했지만, 그 생각은 두터운 음량만큼이나 짙은 감성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가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해주시는 긴 이야기들은 처음엔 코웃음 치다가 점점 매료되어서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은. 어린 내가 바라보기엔 너무 높아 올려보기를 포기하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같이 들었던 친구가 들으면 들을수록 존경스러운 교수님이라며 입이 달도록 칭찬했을까. 우리가 받은 건 고작 매 달 밀려들어오는 과제와 매 주 얻어듣는 호통뿐이었는데도 말이다. 교수님.. 더보기
스무번째, 주워담는 일 #주워 담는 일 누군가 부정해도 나는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모든 사유는 같은 흐름이고, 우리가 저마다 가진 말의 기저엔 동일한 논리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쓰는 글은 표현법이 다를 뿐이지 모두 같은 이야기며 단지 직업적인 작가들의 글은 더 세련되고 정제된 표현들에 의해 매문된다고 느낀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글 쓰는 일에 관해서 많은 푸념을 하는데, 다름이 아닌 자기 글을 의심하는 일이다. “내가 작가도 아닌데, 이런 글을 써도 누가 봐 주겠냐”며 하소연하는 일들을 생각해보자. 어쩌면 읽고 있는 당신과 글을 쓴 나도 분명 해보았던 말이다. 분명 글은 배운 모두가 쓸 수 있는 자유로운 행위다. 그렇지만 주변의 시선은 오묘하게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는데, 마치 우리의 글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평가하려.. 더보기
열아홉번째, 독설가에 대하여 독설가에 대하여 연락이 왔다. 잊고 있던 이름이었는데, 다시 연락이 오니 잊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내게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딴 걸 공부해서 뭐해? 그 시간에 영단어를 외워 멍청아.” 사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도 못하고 자존감이 바닥에 맞닿았던 무렵, 친구의 조언이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소중한 조언’이라 생각하곤 그 이야기를 꼭꼭 씹었다. 남이 내게 미운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게 나를 위한 이야기라 착각하는 게 내 버릇이곤 했다. 그런데 먼 훗날, 그 조언이 얼마나 형편없는 위선이고 날선 깔봄인지 알아차리고 말았다. 아마 난 이때부터 인간관계에 깊은 회의를 느꼈던 모양이다. 차차 계속되는 조언질에 나는 입을 꾹 다물다가도, 도저히 참을 수 없겠다 싶어 친구의 .. 더보기
사진 건호야 고마워 잘쓴다 더보기
열여덟번째, 섭섭한 마음에 #섭섭한 마음에 무언가 너에게 대단한 선물을 바라지는 않았다. 최대한 부담 주지 않으려고, 혹시나 네가 불편해지지 않을까 나는 항상 걱정하며 행동했다. 혹시나 내가 너를 오해하지는 않을까 함부로 지레짐작하지 않고, 이따금 너를 좋아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 때. 난 최선을 다해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그만큼의 보상을 바라는 심리기재였지만, 역시 사람과 감정은 호소한 만큼의 감정이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투입대비산출량의 효율이 아주 엉망인 셈이다. 이미 넌 확고한 입장이고 내게 돌아섰으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선택 역시 존중해야 했기에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서운함과 그리움은 여전히 몸에 배겨 이곳저곳을 맴도는데, 그래서 중간 중간. 네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시간은 우.. 더보기
열일곱번째, 이해타산 #이해타산 “넌 선물 줄 사람이 많네.” “응, 오래 사귈 친구들은 선물해주려고.” “엄청 친한 친구가 아니라?” “둘이 같은 거라 생각하는데 아닌가.” “완전 다른데” 친구는 단호하게 두 종류가 서로 다르다고 말했다. 오래사귈 친구와 친한 친구, 난 같다고 생각했음에도 친구가 내 의문을 부정으로 받아친 탓에 깊은 사색에 빠졌고, 나 자신이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했는지 생각했다. 보통 인간관계에는 ‘깊이’가 있다. 서로 비밀을 공유하고, 아는 관심사를 공유하거나 재미있는 취미처럼 같이 공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깊이 있는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 반면 내 인간관계에는 깊이라고 할 무언가가 없다. 마치 초겨울의 얇은 얼음판처럼 언제고 힘을 가하면 쉽게 깨질 관계들뿐이었다. 그건 상대의 문제라기보다 어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