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스물세번째, 순수한 죄책감

#순수한 죄책감

 

    평생 글을 쓰겠다고 약속한 계기가 있다. 바로 죄책감이다.

    나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 햇수로 치면 벌써 4년이나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많은 인간관계가 그렇듯 마냥 싸운 일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막심한 선택이었는지 서서히 깨달았다. <상실의 시대>의 표현처럼 오히려 시간이 흘러 기억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기억은 더 세세하고 뚜렷하게 보이는 듯하다. 사람을 가벼이 여기던 시절에 그냥 재밌는 놈이구나 싶어 친하게 지냈던 옛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네 도움은 내 생활 전반에 스며들어 있었다. 막무가내로 쓰던 글을 너에게 보여줬고, 너는 우스갯소리를 섞어가며 부담 없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모든 꿈에 대해 부정하던 나와 정반대의 가치관과, 그러면서도 나를 격려하던 네 마음을 잊을 수 없다. 그런 감동들은 이제 와서는 내게 더욱 큰 죄책감을 선사하고 만다.

    자연스레 네 태도와 행동을 하나하나 배워갔다. 그건 의도하지 않은 배움이었지만, 너도 나도 은연중 느끼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기본적인 예의가 없어 매일 매일 담임에게 혼나던 무렵, 너는 어떻게 해야 선생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지 알려준 일과, 사람에게 말을 할 때는 무엇이 중요하며, 사소한 태도를 놓치지 말라고 귀띔해 준 일들처럼 말이다. 나열하자면 너무 많고 감사한 마음은 내 글쓰기로는 너무 모자랄 뿐이다. 자신감 있는 태도나, 일을 진행하는 능력이나, 누군가에게 갖추는 예의나, 많은 일에 관심가지는 태도. 긍정하는 가치관은 심지어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네 흔적이 남아있다. 결국 나의 모든 장소에 네 흔적이 있는 셈이다. 가장 큰 대목은 대인관계. 네가 나에게 보여준 그 든든한 다정함이었다.

    어쩌면 첫 친구였다고 생각한다. 친구와 사진을 찍고, 종일 다니며 같이 공부를 하거나 되도 않는 개소리로 웃으면서 숨 쉴 틈도 없이 놀았던 시절을 처음 경험했다. 그렇게 공부를 성취하고, 또 놀고. 뭔가 목표를 세우고, 같이 무언가 하나에 매진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값진지 앞으로도 다시 느끼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싸우고 나서 돌변한 네 태도에 별 일 아니라 생각했지만 우울증처럼 덮치는 기분이 내 솔직한 감정을 비추고 있었다. 관계를 경시하고 타인의 조롱을 함부로 믿고, 친구를 오해한 건 전적인 내 잘못이다. 당초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들 신뢰가 쉽게 깨졌다면. 내 잘못일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수백 수십 번을 곱씹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순간 닥쳐올 수많은 죄책감에 짓이겨 아무것도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 알아차린 때부터, 나는 오히려 죄책감에 절어 살기 시작했다. 그건 무기력한 죄책감이 아니라 너에게 보답하기 위한 하나의 목표였다. 내가 가진 분명한 감정을 살려 오히려 삶의 원동력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난 편지를 쓰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내가 과거보다 성장했다고 믿기 위해서 인정하는 인간이 되고자 했다. 거침없이 글을 쓰면서부터 모자라고 형편없다고 놀림 받을지언정, 내 감정이 가짜라고 부정당하는 일만큼은 인정할 수 없다. 남겨두지 말고 모두 털어 아픈 속내는 깨끗이 남겨, 순수한 죄책감을 남겨두자, 그리고 나에게 감정을 고백하듯 외면과 내면을 결부시키기 위한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 그것이 내 죄책감이고, 이것이 내 글이라고 난 말할 수 있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물다섯번째, 그래도  (2) 2018.03.11
스물네번째, 성장을 의심하다  (0) 2018.02.21
스물두번째, 지적허영  (0) 2018.02.16
스물한번째, 우산  (0) 2018.02.11
스무번째, 주워담는 일  (0) 2018.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