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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쓰기

004, 혐오가공

#혐오를 가공하다.

 

    출처는 좋아하는 어느 개인 라디오다. ‘언어 혐오’, 혐오적인 단어를 사용할수록, 오히려 그 현상이 심화되고 생각은 번지며 더욱 심각한 현상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 맘충이나 틀딱처럼 말이다. 익히 들어봤을 이 단어들은 혐오를 공유할 수 있도록 수단화되어 누군가를 비난하기 편리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 단어로 하여금 웃거나 비난하며 공감을 사고자라 유행어처럼 번진다. 특정 대상에 대해 비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하나의 범주로 밀어 넣어 통일시키면 누구든 편하고 간단하게 많은 다수를 혐오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저마다 다른 사람일 텐데 이들은 하나의 유형으로 일반화되는 일이 마냥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맘충이란 단어를 알고 있던 어느 한 주부가 카페에서 맘충 소리를 들었다면 정당성의 여부를 떠나서 얼마나 충격적인 일일지 생각해 보자. 분명 누군가는 왜 맘충 소리를 들었는지가 중요하다며 인과여부를 따지려 들겠지만 그 전에 이미 맘충이란 단어로부터 상대에 대해 혐오의 시선이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즉 이런 혐오적인 단어들은 정당성의 문제가 아니라, 앞서서 선행되는 선입견들이 문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고, 이런 선례가 있다면 모든 주부들은 맘충의 가능성이 열려있으며 그 자체로 언제든 혐오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언어가 혐오를 조장한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이 용어들의 문제를 알았다고 해서 간단히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 한정으로도 말이다. 우린 이 단어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더라도 멈출 수 없는 게, 이미 주변 사람들이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우린 그 사이에 노출되어 있다. 혹여나 내가 친구에게 이게 잘못됐다고 말하면 역으로 정당성을 논하며, 야 이래도 너는 이게 옳다고 생각해? 처럼 수긍의 문제로 전락한다. 아니면 진지충이겠다. 결국 진지충도 조장되는 혐오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고 있으므로 이따금 가지는 부정이야 쉽사리 묻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말 유의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혐오가 타의에 의해 조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정 사람들이 말을 사용해 혐오를 정형화하고 조장하면, 단어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엇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때 그 범주를 생각한다. 예로 일베충이란 말을 알고 있는 학생들이, 누군가 노무현이라고 말했을 때 혹여나 일베충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하는 일처럼 말이다. 심리적인 기제 속에서 상대가 일베충이 아닐까 의심하고 나아가 내가 일베충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런 부분들이 다 가공된 혐오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해결되기 어렵더라도 우리가 이 현상을 마냥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단어를 쓰던 안쓰던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이른다.

    의외로 이 현상의 해결법은 명료한데 단지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가장 비현실적인 답이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혐오의 합일체로 자리 잡은 대명사들은 우리가 쓰지 않거나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때조차 역으로 정당성을 주장하며 반대여론을 묵살시키려 한다. 혹은 동조하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또 그조차 노출된 환경으로부터 혐오적인 말을 내뱉도록 유도 당한다. 결국은 끝도 없는 내적 싸움과 지겨운 노력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정형화된 혐오는 언제든 번질 수 있다. 우리는 혐오가 무엇인지도 알고, 그게 도의적으로 옳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현실을 살아가면서 인지하지 않을 뿐이다. 결국 개개인의 차이는 얼마나 신경 쓰고 의식하느냐의 차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찬가지로 언제든 실수할 수 있고 함부로 이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더 곱씹고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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