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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40, 종강

    지난 어떤 반년보다도 기억이 물씬 스며든 짙은 시간을 거듭했다. 어느 해보다 노력했고 동시에 실패했던 극적인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사랑받은 만큼의 미움 받음이 원망스러운 시간동안, 자책할 수 있는 자신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자책을 했다고 생각한다. 매 순간 그렇듯 돌이켜보면 내 실수밖에 없고 말뿐인 허상인 자신에게서 언제야 변할 수 있을까 하는 넋 놓고 막연한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적어도 이제는 그래야 한다고 절실히 느낀다.

    시도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고 생각해서 시도했다지만 그건 모두 핑계고, 단지 안도감을 느끼고 싶었다. 내 처지에서 내 상황에서 나를 바꿀 수 있는 건, 내 노선에 한 치의 오차를 만들 수 있다면 뭐든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건 전혀 아니었고 실제로 나는 많은 노력을 가했다. 그러나 노력한 만큼의 실수를 만들었으므로 그 의미가 퇴색됐을 뿐이다. 결과적으론 내가 잃은 게 너무 많으니까.

    사람들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았을 때. 나는 뻔뻔하게도 이해할 수 없었다. 미련한 동물이어서 그럴까. 곱씹을수록 선택이 후회되고, 그렇다고 돌이킬 수 없는 걸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한편으로는 우리한테 할 말 없어?, 얘기는 해야 할 것 아냐의 문자를 받곤 정말 핑계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도망친 자신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난 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미 도망친 거다.

    잘못의 원인은 언제고 항상 나로부터 찾을 수 있다. 난 그걸 부정했을 뿐이다. 그리고서는 사건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위로받기 급급한 자신은, 어쩌면 변했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더 추악하다고 느낄 만큼의 죄악이었다.

무엇이 잘못이냐. 그것은 신중함이다. 선택이고, 선택하면서도 짊어질 줄 모르는 얄팍한 책임감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다. 싼 입도, 여과할 줄 모르는 생각도, 지레짐작도 잘못이다. 이젠 알겠다. 내가 잘못이 없다는 비겁한 변명을 줄곧 늘어놓으면서 배웠다.

    신중하지 못한 많은 선택들이 스스로를 좌초시켰다. 자꾸 웃음이 나온다. 난 여태껏 뛰는 시늉을 했던 거다.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브랜드가 있는 옷을 맞춰 입고, 카카오톡 프로필에 언제고 내 상태를 올려놓으면서. 내가 이렇게 노력한다고, 혹은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던 거다.

    얼마나 바보 같을까. 진짜가 하나도 없는 깡통인데. 그런 생각에 빠진 근래, 친구와 밥을 먹다가 사소함을 발견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서도 물을 따라주는 정말 칭찬하기도 민망한 사소 예의. 친구는 그걸 기본이라 말했다. . 맞다. 내겐 기본이 없었다. 난 기본이 없이도, 내가 뭐든 이해하고 할 수 있을 거라 덥석 믿고는 학생회니 홍보단이니 연애니, 우스워도 한참 웃길 헛짓이나 했으니 말이다. 만약 나를 매일매일 칭찬했던 교수님께서 아신다면 이만큼의 쇼가 없을 거다.

    그러니 더 바보 같으므로 자신을 채우기엔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제발 이제라도, 매일 반복했던 해마다의 잘못들을 더 걷어드렸으면. 더 순수한 죄책감으로 사람다움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이 되었으면 하길 수도 없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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