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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37, 어딘가에 속하려는 욕심

#어딘가에 속하려는 욕심

 

   나는. 항상 외로웠고

   언제나.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도 사무치게 외롭다.

   답답하게 안에 맺혀 목소리가 되지 못한 외로움으로부터, 한을 풀기 위해서 또 다른 만남을 찾아 나서고, 무르익을 즈음이면 또 다시 소외를 느낀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받아야 했다.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말은 곧 사람 사이에서 나자고 싶다는 이야기다. 언제고 줄곧 누군가의 품에서, 누군가에 의해 행동하기를 원했다.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날 섰다고 생각하는 모든 스스로를 버리고 비워, 비운 공간만큼 타인의 생각을 담았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당연히 뻔하다. 나를 버리고 타인을 받아들이다보면. 그건 최종적으로 나를 부정하는 일이다. 온전치 못한 나로부터 받아들이는 타인은 무의미해지고, 그럼 어딘가에 속하려는 욕심은 그 의미가 퇴색된다. 그릇을 찾는다고 해서 담을 내용물이 멀쩡하지 못한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도 사람은 마음을 비우기가 쉽지 않다. 반복되는 욕심과 습관은 악이 되어, 이를테면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아 스스로를 괴롭게 만든다. 갈증을 바닷물로 푸는 일처럼 말이다. 그래서 생각하건데, 우리는 왜 소외를 느끼는 걸까. 소외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걸까. 괴로울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내 높아지는 기대치가 더 많은 상실감을 만들고, 기대했던 많은 이들로부터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며 또 그걸 납득해버리는 스스로가. 내가 느끼는 모든 외로움의 근본적 문제는 나 스스로의 욕심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납득할 수 없다. 납득하고 나서는, 납득하지 않을 때 보다 더 큰 우울과 상실에 빠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모자라다고 생각하더라도 노력으로 극복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순간순간의 모든 관계에서 내 전부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 수 백 번의 발표에도 난처한 상황에서의 한마디 대답이 더 어렵다. 내 어리숙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충분한 꺼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섭다. 많은 해답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만큼 손에서부터 멀어지는 많은 것들이, 벗기고 벗겨도 끝이 없다고 여겨지는 자신으로부터 이제는 지겨움마저 든다. 왜 이렇게 외롭고 무서운지를 모르겠다. 이유가 없다. 그저 망연할 뿐이다. 입이 달렸는데도 호소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얼마나 무력함을 느껴야 하는지조차 표현할 수 없는 내가 싫은 거다.

   어딘가 속하려는 욕심 탓에 많은 걸 놓쳤다. 중요한 스스로가 이렇게 엉망이어서야 뭘 할 수 있을까. 필요할 때 마다 어디서 주워온 건더기들을 덕지덕지 붙여서는 뭐가 뭐인지 누가 나인지도 모를 이런 상황에선 무엇도 신뢰할 수 없다. 난 온통 껍데기뿐이다. 정말 사무치게 외롭다면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인간은 없겠으나 흔들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무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찾을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주는 더 많은 사람들을 앞서 생각하고. 내가 누군가와 놀고 함께하기 이전에 내가 무엇을 해야 즐거울지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도 처한 상황과 혼란스러움이 주어진다면 뒤설켜 어렵게 만들기 마련이다. 까닭에 가장 기본적인 생각들을 머리말에 두어 하나의 지침처럼 여긴다면, 내가 더 보다 나은 인간으로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런 희망을 가져야 더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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