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39 왜 우린 공감하는 척 하는가

#왜 우린 공감하는 척 하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다수의 동의로부터 혼자만의 부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뻔한 이야기다. 사람은 원래부터 불쾌하고 어색한 상황을 기피하고, 때문에 작은 동의로 문제를 피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공감을 내어준다. 그러면 다수와 함께하고, 독자적인 고민을 안을 필요가 없으므로 편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공감하는 척 한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웃을 때 나 혼자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 테두리 안에서 함께하기 위해 웃는 거다. 한편으론 그것이 잘못된 사실이더라도 덜컥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그렇단 이야기다.

   이따금 공감하지 못한다고 하면 우리가 우려했던 상황이 나타나곤 한다. 왜 이해를 못하냐며 답답해하는 직설적인 화법일 수도 있고, 내지는 그저 침묵으로 나를 무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내 의견이 주장됐을 때 일어나는 불쾌감을 견뎌 딛고 자기 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고, 또 그런 몇 마디를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생각할 수도 있다. 더욱이나 우리나라처럼 우리라는 의식이 강한 사회에선 굳이 빗겨나가려는, 부정하려는 소수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런 상처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마침내 경험으로 숙달하고 생각한다. 구태여서 부정할 필요 없이 공감하면 그만이라고. 그래서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의견을 동조하는데 익숙해진다.

적어도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런 상처받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무렴 말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바보같이 힘쓰며 말하기보다 그저 동의하고 그 상황을 모면하기만 한다면 불편할 것도 없이 힘쓸 것도 없이 지나보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안이한 행동을 지난 세월 이어왔고. 최근에서야 주춤주춤 내 의견을 말해보곤 있지만 그나마도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일 뿐이다. 말이 되지 않는 논리로 이야기를 주장하는 낯선 사람들 앞에선 난 그저 침묵해야하지만 그게 평화를 안치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공감하기 어려운 바깥에서의 생각보다, 그 대화와 공감을 고민하는 그 이후의 생각이다. 처해진 환경이 달라지고 타인에서 벗어나 홀연히 나로 돌아오면 내가 한 공감이 가지는 의미를 돌이켜보는 생각 말이다. 바깥에서는 눈치 보느라 그렇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돌아와선 반대로 말하는 우리들에 관하여, 그것이 실수해놓고 집에 돌아가서 하는 후회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 부정해야할 일에 대해 논리적이고 신념적인 선으로부터,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경계 사이에서 무엇을 적당히 해야 하는지 어느 누구도 개념을 잡아줄 수가 없다. 상호주관적인 대화에서 뭐가 답인지는 스스로가 이해해야 하고, 갖가지 실수들을 경험하면서도 우린 마찬가지로 실수하고. 그 실수가 두려워 혹은 피하기 위해서 공감하는 척 한다. 그건 어쩌면 일상의 범주에서 서로의 테두리를 걱정하는 일처럼 보인다. 그래서 모르더라도 아는 척 하고, 어렵더라도 이해한 척 하고, 공감되지 않더라도 공감하는 척하며 상황을 모면하는 게 아닌가. 왜 우린 이 답답한 반복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까.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난 빠져나올 수가 없을까. 결국. 이 행동들도 언젠가는 스스로를 파묻는 하나의 함정이 되지 않을까.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41, 안다는 거짓말  (1) 2018.07.01
#40, 종강  (0) 2018.07.01
#38, 나도 알지만  (0) 2018.05.04
#37, 어딘가에 속하려는 욕심  (0) 2018.04.28
#36, 무서울 때  (0) 2018.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