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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나름의 정리

중국근현대사(19-20세기)에 대한 나름의 정리

   청나라 건륭제의 일방적 무역체제는 서양의 기존 방식과는 어긋나 있었다. 때문에 은의 흐름은 청나라에 집중되었고, 영국은 이를 회복하기 위해 ‘아편’이란 편법을 사용한다. 이미 식민지화된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청나라에 불법유통해 은을 회복하고자 한 취지였다. 그러자 청나라는 그 자체로 마약에 찌들었고, 나라가 제기능을 하지 못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아편을 단속하고 이를 거부하자 영국은 청나라를 가만두지 않았고, 의회 내에서의 격한 의견갈림 끝에 전쟁이 결정됐다. 중국근대사의 거두절미한 시작이다.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 즉 중국은 그 거대한 역사와 세계에 비해 보잘 것 없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서구에서 가지고 있던 중국세계에 대한 인식은 철저히 파괴되고, 그 옛날 무굴과 아프리카처럼 하나의 식민지 거점으로 전락한 셈이다.

   태평천국 운동처럼 시기를 틈타 외세에 대한 저항이 있었으나 오히려 외세는 서태후에게 압력을 가하고 서양 군대를 비롯한 같은 중국인끼리의 싸움이 시작된다. 천자와 황계를 하늘로 여기던 중국인들이 이러한 내분적 현상에 대해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외세에 대한 청나라의 경시는 계속됐고, 머지않아 청나라는 쑨원과 위안스카이에 의해 자연스레 사라지게 된다. 19세기 말 서슬퍼런 중국사였다.

   난징 조약이후 개항이 아닌 개방에 의해 해마다 중국에 대한 침탈은 심해졌다. 물론 한 때 양무운동처럼 변화하려는 시도는 있었으나, 보여주기식인 노력은 무의미함을 증명할 뿐이었다. 중국인들은 저마다의 저항을 이어나갔고 와중 ‘5.4 운동’으로 그 큰 획을 그으며 외세에 대한 강한 저항심을 표출했다.

   그런 역사의 거대한 흐름 사이에서 마오쩌둥과 동지들은 작은 배 위에서 ‘공산당’을 창당했다. 이들은 훗날 세계 역사에 둘도 없을 정부의 시작인 셈이다. 이러한 복잡한 20세기에 일본은 중국을 돕는 척하며 그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타이완과 대한제국에게 그러했듯이 말이다. 결국 <루거우차오 충돌>로 일본은 중국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임진전쟁 무렵 청나라를 정복하겠다는 도요토미의 의욕처럼, 일본 아니 대일본제국에게 중화민국은 정복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중국 내부에서는 쑨원 이후 중국의 향도성이 된 장제스가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합작해 저항했다. 이는 외세에 맞서기 위한 힘의 결합이었으나, 곧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에 의해 일본이 항목하면서 합작은 다시금 경쟁으로 변질됐다.

   요컨대 중국근대사는 아편전쟁으로 촉발된 열강의 침략 사이에서, 중국이 현대사로 변모하는 복잡한 폭풍사이,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대립으로 느껴진다. 결국 공산당은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부폐한 공산당을 포모사로 몰아넣었고, 마침내 중국은 하나(一)로 돌아간다,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시작이었다. 또한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이 세력의 공고화를 도왔다. 마오쩌둥은 바로 1차 5개년계획으로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공산당의 주 지지세력인 농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백화 운동으로 중국공산당의 위협이 되는 지식인층을 배척하는 작업 역시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실수는 바로 <대약진 운동>이다. 그는 2,000만명의 사람을 살해한 셈인데, 중국공산당의 신격화로 그의 실수는 덮이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불만들은 파룬궁 문제와 천안문 사태로 마오쩌둥 실각 이후 자리잡은 덩샤오핑마저 강하게 뒤흔들고 만다. 데탕트 이후 중국공산당은 차츰 외부에 대한 가림막을 조금씩 걷어내고 있고, 현재는 WTO에 가입해 세계화 작업이 이뤄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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