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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스물다섯번째, 그래도 2018.03.12. #그래도 사람에게는 개인적인 영역이 있다. 온갖 험담이나 악담이나 뒷담이나, 진짜 세상 끔찍한 이야기를 들어놓는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그렇다. 정말 듣다보면 이 새끼들이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해괴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어쩌다보면 술기운에 동조해 동의하는 나 역시도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차례차례 술이 깨어가며 멀쩡한 정신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이게 어디까지가 맞고 이해해야 하는 일인지 의아할 때가 잦다. 걔는 별로더라, 그딴 노래를 왜들어? 이상한 새끼들이야, 정치는 말이야, 그 새끼는, 누군가의 뒷담이나 특정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비난하는 그 과정 속에서, 제정신으로 가만히 있는 나는 이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래도 친구인데 그냥.. 더보기
스물세번째, 순수한 죄책감 #순수한 죄책감 평생 글을 쓰겠다고 약속한 계기가 있다. 바로 죄책감이다. 나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 햇수로 치면 벌써 4년이나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많은 인간관계가 그렇듯 마냥 싸운 일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막심한 선택이었는지 서서히 깨달았다. 의 표현처럼 오히려 시간이 흘러 기억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기억은 더 세세하고 뚜렷하게 보이는 듯하다. 사람을 가벼이 여기던 시절에 그냥 재밌는 놈이구나 싶어 친하게 지냈던 옛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네 도움은 내 생활 전반에 스며들어 있었다. 막무가내로 쓰던 글을 너에게 보여줬고, 너는 우스갯소리를 섞어가며 부담 없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모든 꿈에 대해 부정하던 나와 정반대의 가치관과, 그러면서도.. 더보기
스물두번째, 지적허영 #지적허영 나쁜 버릇이 있었고, 지금도 남아있다. 그건 짙은 허영심이다. 당장은 괜찮아 보이면서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웃음이 새어나올 옛날 일들이 떠오른다. 매일 무식하다고 무시 받은 고등학교 시절, 유일하게 내가 잘하는 게 글쓰기라 생각하곤 한창 위로하던 그 무렵. 나는 사람들에게 단어 선택이 부자연스럽고 안 쓰는 말을 괜히 고집한다고 혼났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 단어들은 내 자신감이었고 글을 과시하는 수식이어서 형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도통 잔소리 이상으론 듣지 않았다. 책을 읽지 않고 글만 쓰다 보니 보이는 게 내 글뿐이고, 그래서 내 세상에 빠져든 탓이다. 그런데 대학교 진학 후 교수님에게 들었던 비평이, 내가 얼마나 잘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는지 실감토록 했다. 딴에는 잘 썼다고 제출한 답.. 더보기
열일곱번째, 이해타산 #이해타산 “넌 선물 줄 사람이 많네.” “응, 오래 사귈 친구들은 선물해주려고.” “엄청 친한 친구가 아니라?” “둘이 같은 거라 생각하는데 아닌가.” “완전 다른데” 친구는 단호하게 두 종류가 서로 다르다고 말했다. 오래사귈 친구와 친한 친구, 난 같다고 생각했음에도 친구가 내 의문을 부정으로 받아친 탓에 깊은 사색에 빠졌고, 나 자신이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했는지 생각했다. 보통 인간관계에는 ‘깊이’가 있다. 서로 비밀을 공유하고, 아는 관심사를 공유하거나 재미있는 취미처럼 같이 공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깊이 있는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 반면 내 인간관계에는 깊이라고 할 무언가가 없다. 마치 초겨울의 얇은 얼음판처럼 언제고 힘을 가하면 쉽게 깨질 관계들뿐이었다. 그건 상대의 문제라기보다 어느.. 더보기
네번째, 소외처 소외처 나는 내게 소외당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격도 충분하며 남들보다 좋은 여건을 가졌다. 없는 말주변과 관심사가 드물고 타인에게 신경 쓰지 않으며 자기생각이 많은 사람이니 자연스레 주변으로부터 소외받기 마련이다. 소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외면하는 사회에서 단지 스스로가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나쁘고, 정말 나쁘다고 한다면 오히려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살아가려 한다. 인식의 차이일까. 물론 나 역시도 누군가를 좋아했었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함께하는 일에 결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오히려 앞장서서 사람들에게 다가가 낯선 분위기 사이에서 나의 다정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든든하네, 성격이 좋구나, 긍정적이야. 호의를 베풀면 대부분 좋은 대답이 들려온다. 생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