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스물한번째, 우산

#우산

 

너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꼭 우산을 생각해라.”

   나는 그 차디찬 겨울날 교수님의 짙은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원래 교수란 딱 두 가지인데, 이상하거나, 엄청 이상한 사람. 이 두 가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교양 과목의 그 교수님은 워낙 이상하고 특이했지만, 그 생각은 두터운 음량만큼이나 짙은 감성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가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해주시는 긴 이야기들은 처음엔 코웃음 치다가 점점 매료되어서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은. 어린 내가 바라보기엔 너무 높아 올려보기를 포기하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같이 들었던 친구가 들으면 들을수록 존경스러운 교수님이라며 입이 달도록 칭찬했을까. 우리가 받은 건 고작 매 달 밀려들어오는 과제와 매 주 얻어듣는 호통뿐이었는데도 말이다. 교수님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 겨울 종강 때였다.

   학기의 막바지 이제는 이 교수님도 끝이구나 싶어 생각을 절제하면서도, 교수님께서 취하시는 사소한 행동과 무르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강의실 바깥으로는 차갑게 폭설 치는 풍경이 보였고 들어오는 빛은 옅은 밝기로 강의실을 비추었다. 섬세한 손짓으로 입고 오신 옷을 의자에 걸어놓으시고, 습관적으로 고개를 까닥이시는 교수님께선 이전처럼 한참을 바깥을 바라보시다 운을 떼시며 말씀하셨다. 그랬다. 인생에서 우산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끝마디마다 갈라지는 교수님의 목소리. 자신도 이젠 머지않아 학교를 떠나 자신이 다할 때 까지 글을 쓰시겠다는 그 말씀이 아직까지도 자명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말 진심으로, 이 학교 어느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해 가르치셨다며. 이 마지막 순간마저도 너희에게 삶을 이야기해주고 싶다며 창밖을 바라보셨다.

   폭설이 몰아치는 창밖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우선은 흩날리는 눈보라 탓에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고 우산을 쓴 채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이었는데, 교수님은 그 모든 풍경을 가리키시며 저것이 삶이라 칭하셨다. 어떤 비유인지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교수님의 어투와 한학기의 종강이란 분위기가 교수님의 말씀에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가 감돌도록 도왔다. 가져오신 우산을 들고 우리들에게 보여주며, 지금 교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우린, 저 설 눈과 눈길이 아름답기만 하지만 바깥에 있는 누군가에겐 큰 어려움이란 이야기. 그것이 삶이고, 우리가 본질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첫 번째 차원의 문제라고, 때문에 너희는 살아가며 우산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면서도, 그분의 눈물 맺힌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곤. 난 이분이 얼마나 진지하게 우리에게 조언하며, 우리가 살아가며 느낄 풍파를 그분께서 조금이나마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듯해 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렇구나. 결국 우리는 피하고 피하지만, 교수님의 말씀처럼 언젠가 눈은 내리고 언젠가 우산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난 그날 이후 교수님의 몇몇 조언과 우산에 대해 항상 생각한다. 살아가며 느낄 많은 바람과 선택에 관하여, ‘본질우산을 꼭꼭 씹어 평생 소화 못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머리에 심어둔다. 그렇게나마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내가 더 자라날 수 있다면 그것만큼 값어치 있는 배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호통 치는 목소리마저 따뜻했던 그 교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여념 없이 살아가고 싶다.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물세번째, 순수한 죄책감  (2) 2018.02.19
스물두번째, 지적허영  (0) 2018.02.16
스무번째, 주워담는 일  (0) 2018.02.11
열아홉번째, 독설가에 대하여  (0) 2018.02.09
열여덟번째, 섭섭한 마음에  (1) 2018.02.03